『졸업자 집중취재』는 2021년 졸업 후 취업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우선 험난 한 취업의 장벽을 넘은 그들에게 축하를 표하며, 그들이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취업의 벽을 넘어 새로운 진로에 접어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이야기에 담기지 않은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은 후배/혹은 많은 청년들은 아래 계정을 통해 만남문의/대신물어봐주세요 신청을 부탁드립니다.
insta:@ysarch.official e-mail: ysarch@gmail.com 카카오채널: @연세건축총동문회 |
풍선이랑 날아가는 기분
i 건축으로 오는 험난한 과정
자기소개 부탁한다.
13학번 김한결이다, 사실 토목과로 입학해서 전과를 통해 건축학과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수료 후 졸업유예 등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20년 8월에 졸업을 했다. 지금은 작은 식당을 운영 중이다.
처음에 토목과에서 건축과로 전과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실제로 토목과에 간 이유는 도시, 건축, 건설 전부다 포함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진로를 정할 때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 같아서 갔다 하지만, 막상 입학을 하니 유체역학 같은 공부들이 너무 맞지 않았다. 공학을 공부하는 데 많은 고민이 들더라.
그리고 여름방학 때 건축과를 다니는 친구를 통해 창작하는 일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 졌다.
학창 시절부터 건축에 관심이 있던 셈이다.
‘건축’ 이렇게 진로를 정했던 것은 아니고. 확실히 무언가 만들고 기획하고 이런 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일들이 대부분 무언가 만드는 일이더라. 결국 무언가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과에 속해 있던 건축, 기계, 토목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발표가 난 후 제일 좋은 학교로 일단 진학을 했다.
여름방학 때 건축과로 전과를 선택했으면 이듬해 전과를 신청하나? 절차가 어떻게 되는 건가?
결심이 선 1학년 2학기부터 바로 건축 수업을 들었다. 전과는 어차피 2학년 2학기부터 가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건축과 수업, 토목과 수업을 1년 정도 병행했다.
전과는 쉽게 진행되는 편인가
일단 1차로 토목과 심사를 받아야 하고, 2차로 건축과 면접을 봐야 통과된다. 보통 토목과에서는 대체로 통과를 시켜주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뚝 떨어졌었다. 첫 시도에는 그냥 내가 성적이 안 좋아서 떨어졌나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3학년 1학기에 두 번째 토목과 심사에서 떨어졌었다. 이때부터는 심각한 생각이 들더라. 왜냐하면 전과 기회는 입학 후 3번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왜 떨어졌던 것인가.
알고 보니 첫 소속 변경 때도 신청한 학생 중에 나만 1차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토목과 교수님을 그제야 찾아가서 물어봤다. 그때 알게 되었다. 토목과 교수님은 토목과 오자마자 바로 건축과 수업도 듣는 아이. 전과를 염두에 두고 입학을 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결국 그 이후 오해를 풀고 전과를 한 것인가
맞다. 그렇게 마지막 기회에서 토목과 심사도 통과하고 건축과 면접도 통과해서 겨우 전과를 할 수 있었다.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
힘들게 건축학과에 와보니 어땠나
너무 좋았다. 일단 동기들 자체가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는 성향인 점이 내 스타일이었다. 경험도 풍부하고 생각이 깊어지는데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심지어 설계수업이 교수님의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는 점도 좋았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은 무엇인가
마감이 다가오는 설계실 풍경. 많이 기억이 남는다. 마감을 앞두고 매일같이 시켜먹던 배달음식과 후배들 동기들을 불러서 설계실에서 밤을 지새우던 것들이 기억이 많이 남는다. 그리고 마감 이후에는 죽도록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난 평생 건축을 할 거였으니까
평생 건축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언제 깨진 건가
처음 깨진 게 삼우 인턴 할 때였다. 원래 목표는 삼우와 같은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돈을 모으며 실무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언젠가 내 사무소를 차릴 수 있을 것 같은 희미한 목표가 있던 것 같다.
그랬는데 어떤 경험을 했었나
그런데 삼우에서 인턴을 할 때 설계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생겼다.
사실 나는 엄청난 디자인에 대한 욕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실무가 갖고 있는 숙명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형 설계사무소에 들어가도 잘 해낼 거라 생각했다. 나라면 경제적이면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낼 거라고.
그런데 막상 가서 느껴보니 꿈같은 일에 도착하기 전에 난 부품이 될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꼭 건축이어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도 시작했던 것 같다.
ii 사랑했던 건축을 떠나보내며
어차피 직장인의 삶을 살게 될 거라면 건축인이 아닌 삶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던 거다.
맞다. 그러다 내 레이더에 들어온 게 광고였다. 광고기획은 직장인의 삶이라도 엄청 치열한 아이디어 싸움을 하고 끊임없이 창의적이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은 설계스튜디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학교의 설계스튜디오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자꾸 이 대학생의 삶과 닮은 진로를 찾아 헤맸던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속 끊임없이 창작을 하는 일을 꿈꿨던 거 아닌가
맞다. 그래서 광고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알아보니 영어를 진짜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졸업 설계 학기 끝나고 짧게 어학연수를 갔다. 그러고 돌아와서는 바로 한국사 자격증을 따는 등 취준생의 삶이 시작됐다.
광고회사를 가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오픽이나 토스 일정 등급 이상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사 1급은 인정을 받는 것 같다. 그리고 준비해야 할 게 공모전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인턴이나, 우리는 이력이 건축 관련된 것들만 있지 않나. 특히 공모전이라고 해도 건축 수상만 가득해서 급한 대로 친구들과 제일기획 아이디어 페스티벌을 나갔었다.
광고회사는 어떤 곳들을 지원했는지, 그리고 그 회사들을 지원한 이유가 궁금하다.
대형은 전부! 제일기획, 이노션, hs애드 등등.. 고향이 부산인 나는 일단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연봉 3 천후반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건축과 출신들이 사실 잘 지원하지 않는 분야 아닌가. 지원을 할 때는 어려운 것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려움을 알아챌 세가 없었다. 우선 작년에는 위 회사들 대부분 공채를 진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반기에 갑작스럽게 공채가 뜨기 시작하며 탈락하게 되었다. 그러다 열린 광고공모전 <제일기획 아이디어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다짐했었다.
제일기획 아이디어페스티벌: https://ideafestival.chei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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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다짐했나
여기서 수상을 하면 나는 광고를 할 잠재력이 있는 거고, 못하면 쿨하게 포기하자.
그렇게 배수진을 치고 수현이랑 다른 친구들 포함 정말 치열하게 고민해서 기획안을 냈는데 또 수상을 못했다. 사실 저렇게 말해도 원래는 모른 척 끝까지 덤벼들 성격이었는데 작년에는 그게 잘 안됐다.
왜 그랬던 것 같나.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인가.
맞다. 그땐 코로나로 인한 불안함과 집 밖을 몇 달이나 나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우울증이 생기더라. 심지어 토목과 동기들은 다들 취업하는데 나만 안되고 있다는 자격지심이 더해져서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게 되었다. 이후에는 공고가 뜨면 건설사, 인테리어, 설계사무소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그러다 한샘 1차 합격 후 부산에 내려가게 되며 생각이 또 바뀌게 되었다.
세 번째 변화를 거치며 알게 되는 것들
이번엔 어떻게 바뀐 것인가.
그때의 안정감을 잊지 못한다. 가족과 넓은 집, 그리고 익숙한 동네에서 오는 안정감이 너무 좋더라. 서울에 있을 때도 항상 원룸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는데 부산에 가니 이런 것들이 해결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부산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나도 지방 출신이라 그런지 지방에 살고 싶다. 지방에 살아남기 위해 탐구했던 방향들 공유 가능한가.
지방에 내려가기로 하면 일단 높은 연봉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그리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게 되더라. 그리고 지방은 회사 선택지가 자연스레 줄어든다. 결국 지방 공기업을 물색하게 되더라. 그리고 지방에 살면 진로에 대한 꿈은 사라진다. 모든 것은 정말 서울에 있다.
그럼에도 부산을 선택했다.
대신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꿈이 생겼다. 나는 고양이 한 마리와 내 집이 생기는 것이 꿈이 되었다. 사실 이제 광고나 설계 같은 구체적인 커리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안정적인 직장과 워라밸만 지켜지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더라. 그래서, 다시 공기업을 입사하기 위한 취준이 시작되었다.
아 역시 공기업이 답인가. 하지만 지금은 가게를 차린 거 아닌가.
본의 아니게 시야가 넓어지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인데. 어릴 때는 서울은 대기업에 가고 지방은 공기업에 가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서 점점 삶을 쟁취하는 방향이 넓어질 수밖에 없더라. 그러다 보니 사업가의 삶까지 생각이 확장이 되었다. 그러니 기회가 보였다.
흥미롭다. 어떤 기회였나
일단 지방 출신의 최대 장점을 살렸다. 지방 출신은 사실 상권분석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대충 어느 동네 쫙. 하고 데이터가 뇌에 박혀있는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이모 네 분이 모두 같은 동네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다. 그래서 장사가 뭔 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자신만 몰랐지, 장사의 DNA와 인프라가 이미 있던 셈이다.
맞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어릴 때는 장사에 대한 인식이 공부를 못해서 장사를 하는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일단 우리 언니나 이모들이 그랬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은행을 퇴직하시고 카페를 운영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완전히 인식이 달라지게 되더라.
사실상 후계자 교육이다
맞다. 엄마 카페에 슬쩍슬쩍 발을 담다 보니 장사가 재미있어 보이더라. 한창 자격증 공부를 하던 때였는데, 이제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좋은 아이템도 떠오르니 이미 공기업이 뭐가 중요하겠나. 시험 2주 앞두고 그냥 때려치웠다. 그리고 부모님께 사업설명회를 열어서 지원을 받고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일군 사업은 어떤 사업인가
신촌에 초밥 도시락 전문점이 있었다. 워낙 회를 좋아해서 자주 거기서 초밥을 사 먹었다. 미리 만들어 둔 초밥이라 빠르게 받을 수 있고 저렴했다. 그게 가난한 대학생에게는 너무 좋은 조건 아닌가. 그런 가게를 차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초밥은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어렵게 느껴진다
맞다. 진입장벽도 카페에 비해 많이 높다. 그래서 많이 하지 않으니 경쟁에서 더 자유로운 것 아닌가. 나는 요리에 대해서 일자무식한 사람이다. 그래서 프랜차이즈로 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랜차이즈 1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후 첫 가맹문의 이후 한 달 반 만에 가게가 오픈되었다.
마음 먹고 한 달 반만에 오픈이면 굉장히 속전속결이다.
그만큼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동네 상권이 엄청 큰데 대로변에 초밥집이 없고 유명한 초밥집은 다 골목상권에 있더라. 그리고 대부분 빠르게 먹는 초밥집도 아니었다. 이후 배민에서 초밥집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대부분 리뷰와 주문수가 수준 이상으로 높더라.
결국 합쳐보면 결론은 나온 것 같다
맞다. 이 말은 초밥에 대한 수요는 굉장히 높은데 대로변에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메인 상권에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초밥집이 들어가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시락 전문점이라 배달 수요가 늘어난 시점에 더 장사가 잘 된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만족스러운 상태인가
맞다. 하지만 늘 긴장하고 있다. 장사 망하는 건 한순간이다. 끊임없이 고민이 되는 것 같다. 결국 사업을 하는 건 가족이 생기는 일인 것 같다. 우리 가게에 나를 제외해도 정직원이 3명이 더 있고 아르바이트 생이 5명이 있다. 이들에게 월급은 또 그들의 생계의 시작점 아닌가. 그리고 그 생계의 시작이 이 가게에 있다. 진짜 잘되야한다.
소중한 자신의 가게에서 여러 사람을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이다.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같나
음. 다시 돌아간다면 사람을 더 많이 만나되, 관계에서 스트레스는 덜 받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지금 생각해봐도 사람을 많이, 더 깊이 만나고는 싶은데 그때는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는 되게 많이 받았던 것 같더라.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후배들이나 선배들에게 혹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인생에 목표를 갖는 건 좋지만 그 목표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 목표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다른 방향에 새로운 목표를 만들면 되니까. 목표라는 것도 순간순간의 감정에 따라 마음대로 만들고 없애도 아무 상관없더라.
오히려 운 좋게 더 좋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으니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학생활 아디오스
풍선이랑 날아가는 기분
i 건축으로 오는 험난한 과정
자기소개 부탁한다.
13학번 김한결이다, 사실 토목과로 입학해서 전과를 통해 건축학과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수료 후 졸업유예 등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20년 8월에 졸업을 했다. 지금은 작은 식당을 운영 중이다.
처음에 토목과에서 건축과로 전과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실제로 토목과에 간 이유는 도시, 건축, 건설 전부다 포함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진로를 정할 때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 같아서 갔다 하지만, 막상 입학을 하니 유체역학 같은 공부들이 너무 맞지 않았다. 공학을 공부하는 데 많은 고민이 들더라.
그리고 여름방학 때 건축과를 다니는 친구를 통해 창작하는 일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 졌다.
학창 시절부터 건축에 관심이 있던 셈이다.
‘건축’ 이렇게 진로를 정했던 것은 아니고. 확실히 무언가 만들고 기획하고 이런 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일들이 대부분 무언가 만드는 일이더라. 결국 무언가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과에 속해 있던 건축, 기계, 토목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발표가 난 후 제일 좋은 학교로 일단 진학을 했다.
여름방학 때 건축과로 전과를 선택했으면 이듬해 전과를 신청하나? 절차가 어떻게 되는 건가?
결심이 선 1학년 2학기부터 바로 건축 수업을 들었다. 전과는 어차피 2학년 2학기부터 가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건축과 수업, 토목과 수업을 1년 정도 병행했다.
전과는 쉽게 진행되는 편인가
일단 1차로 토목과 심사를 받아야 하고, 2차로 건축과 면접을 봐야 통과된다. 보통 토목과에서는 대체로 통과를 시켜주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뚝 떨어졌었다. 첫 시도에는 그냥 내가 성적이 안 좋아서 떨어졌나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 3학년 1학기에 두 번째 토목과 심사에서 떨어졌었다. 이때부터는 심각한 생각이 들더라. 왜냐하면 전과 기회는 입학 후 3번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왜 떨어졌던 것인가.
알고 보니 첫 소속 변경 때도 신청한 학생 중에 나만 1차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토목과 교수님을 그제야 찾아가서 물어봤다. 그때 알게 되었다. 토목과 교수님은 토목과 오자마자 바로 건축과 수업도 듣는 아이. 전과를 염두에 두고 입학을 한 학생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결국 그 이후 오해를 풀고 전과를 한 것인가
맞다. 그렇게 마지막 기회에서 토목과 심사도 통과하고 건축과 면접도 통과해서 겨우 전과를 할 수 있었다.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
힘들게 건축학과에 와보니 어땠나
너무 좋았다. 일단 동기들 자체가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는 성향인 점이 내 스타일이었다. 경험도 풍부하고 생각이 깊어지는데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심지어 설계수업이 교수님의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는 점도 좋았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은 무엇인가
마감이 다가오는 설계실 풍경. 많이 기억이 남는다. 마감을 앞두고 매일같이 시켜먹던 배달음식과 후배들 동기들을 불러서 설계실에서 밤을 지새우던 것들이 기억이 많이 남는다. 그리고 마감 이후에는 죽도록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난 평생 건축을 할 거였으니까
평생 건축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언제 깨진 건가
처음 깨진 게 삼우 인턴 할 때였다. 원래 목표는 삼우와 같은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돈을 모으며 실무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언젠가 내 사무소를 차릴 수 있을 것 같은 희미한 목표가 있던 것 같다.
그랬는데 어떤 경험을 했었나
그런데 삼우에서 인턴을 할 때 설계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생겼다.
사실 나는 엄청난 디자인에 대한 욕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실무가 갖고 있는 숙명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형 설계사무소에 들어가도 잘 해낼 거라 생각했다. 나라면 경제적이면서도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낼 거라고.
그런데 막상 가서 느껴보니 꿈같은 일에 도착하기 전에 난 부품이 될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꼭 건축이어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도 시작했던 것 같다.
ii 사랑했던 건축을 떠나보내며
어차피 직장인의 삶을 살게 될 거라면 건축인이 아닌 삶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던 거다.
맞다. 그러다 내 레이더에 들어온 게 광고였다. 광고기획은 직장인의 삶이라도 엄청 치열한 아이디어 싸움을 하고 끊임없이 창의적이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은 설계스튜디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학교의 설계스튜디오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자꾸 이 대학생의 삶과 닮은 진로를 찾아 헤맸던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속 끊임없이 창작을 하는 일을 꿈꿨던 거 아닌가
맞다. 그래서 광고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알아보니 영어를 진짜 잘해야 할 것 같아서 졸업 설계 학기 끝나고 짧게 어학연수를 갔다. 그러고 돌아와서는 바로 한국사 자격증을 따는 등 취준생의 삶이 시작됐다.
광고회사를 가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오픽이나 토스 일정 등급 이상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사 1급은 인정을 받는 것 같다. 그리고 준비해야 할 게 공모전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인턴이나, 우리는 이력이 건축 관련된 것들만 있지 않나. 특히 공모전이라고 해도 건축 수상만 가득해서 급한 대로 친구들과 제일기획 아이디어 페스티벌을 나갔었다.
광고회사는 어떤 곳들을 지원했는지, 그리고 그 회사들을 지원한 이유가 궁금하다.
대형은 전부! 제일기획, 이노션, hs애드 등등.. 고향이 부산인 나는 일단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연봉 3 천후반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건축과 출신들이 사실 잘 지원하지 않는 분야 아닌가. 지원을 할 때는 어려운 것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려움을 알아챌 세가 없었다. 우선 작년에는 위 회사들 대부분 공채를 진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반기에 갑작스럽게 공채가 뜨기 시작하며 탈락하게 되었다. 그러다 열린 광고공모전 <제일기획 아이디어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다짐했었다.
무엇을 다짐했나
여기서 수상을 하면 나는 광고를 할 잠재력이 있는 거고, 못하면 쿨하게 포기하자.
그렇게 배수진을 치고 수현이랑 다른 친구들 포함 정말 치열하게 고민해서 기획안을 냈는데 또 수상을 못했다. 사실 저렇게 말해도 원래는 모른 척 끝까지 덤벼들 성격이었는데 작년에는 그게 잘 안됐다.
왜 그랬던 것 같나.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인가.
맞다. 그땐 코로나로 인한 불안함과 집 밖을 몇 달이나 나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우울증이 생기더라. 심지어 토목과 동기들은 다들 취업하는데 나만 안되고 있다는 자격지심이 더해져서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게 되었다. 이후에는 공고가 뜨면 건설사, 인테리어, 설계사무소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그러다 한샘 1차 합격 후 부산에 내려가게 되며 생각이 또 바뀌게 되었다.
세 번째 변화를 거치며 알게 되는 것들
이번엔 어떻게 바뀐 것인가.
그때의 안정감을 잊지 못한다. 가족과 넓은 집, 그리고 익숙한 동네에서 오는 안정감이 너무 좋더라. 서울에 있을 때도 항상 원룸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는데 부산에 가니 이런 것들이 해결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부산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나도 지방 출신이라 그런지 지방에 살고 싶다. 지방에 살아남기 위해 탐구했던 방향들 공유 가능한가.
지방에 내려가기로 하면 일단 높은 연봉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그리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게 되더라. 그리고 지방은 회사 선택지가 자연스레 줄어든다. 결국 지방 공기업을 물색하게 되더라. 그리고 지방에 살면 진로에 대한 꿈은 사라진다. 모든 것은 정말 서울에 있다.
그럼에도 부산을 선택했다.
대신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꿈이 생겼다. 나는 고양이 한 마리와 내 집이 생기는 것이 꿈이 되었다. 사실 이제 광고나 설계 같은 구체적인 커리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안정적인 직장과 워라밸만 지켜지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더라. 그래서, 다시 공기업을 입사하기 위한 취준이 시작되었다.
아 역시 공기업이 답인가. 하지만 지금은 가게를 차린 거 아닌가.
본의 아니게 시야가 넓어지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인데. 어릴 때는 서울은 대기업에 가고 지방은 공기업에 가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서 점점 삶을 쟁취하는 방향이 넓어질 수밖에 없더라. 그러다 보니 사업가의 삶까지 생각이 확장이 되었다. 그러니 기회가 보였다.
흥미롭다. 어떤 기회였나
일단 지방 출신의 최대 장점을 살렸다. 지방 출신은 사실 상권분석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대충 어느 동네 쫙. 하고 데이터가 뇌에 박혀있는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이모 네 분이 모두 같은 동네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다. 그래서 장사가 뭔 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자신만 몰랐지, 장사의 DNA와 인프라가 이미 있던 셈이다.
맞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어릴 때는 장사에 대한 인식이 공부를 못해서 장사를 하는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일단 우리 언니나 이모들이 그랬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은행을 퇴직하시고 카페를 운영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완전히 인식이 달라지게 되더라.
사실상 후계자 교육이다
맞다. 엄마 카페에 슬쩍슬쩍 발을 담다 보니 장사가 재미있어 보이더라. 한창 자격증 공부를 하던 때였는데, 이제 공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좋은 아이템도 떠오르니 이미 공기업이 뭐가 중요하겠나. 시험 2주 앞두고 그냥 때려치웠다. 그리고 부모님께 사업설명회를 열어서 지원을 받고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일군 사업은 어떤 사업인가
신촌에 초밥 도시락 전문점이 있었다. 워낙 회를 좋아해서 자주 거기서 초밥을 사 먹었다. 미리 만들어 둔 초밥이라 빠르게 받을 수 있고 저렴했다. 그게 가난한 대학생에게는 너무 좋은 조건 아닌가. 그런 가게를 차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초밥은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어렵게 느껴진다
맞다. 진입장벽도 카페에 비해 많이 높다. 그래서 많이 하지 않으니 경쟁에서 더 자유로운 것 아닌가. 나는 요리에 대해서 일자무식한 사람이다. 그래서 프랜차이즈로 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랜차이즈 1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후 첫 가맹문의 이후 한 달 반 만에 가게가 오픈되었다.
마음 먹고 한 달 반만에 오픈이면 굉장히 속전속결이다.
그만큼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동네 상권이 엄청 큰데 대로변에 초밥집이 없고 유명한 초밥집은 다 골목상권에 있더라. 그리고 대부분 빠르게 먹는 초밥집도 아니었다. 이후 배민에서 초밥집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대부분 리뷰와 주문수가 수준 이상으로 높더라.
결국 합쳐보면 결론은 나온 것 같다
맞다. 이 말은 초밥에 대한 수요는 굉장히 높은데 대로변에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메인 상권에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초밥집이 들어가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시락 전문점이라 배달 수요가 늘어난 시점에 더 장사가 잘 된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만족스러운 상태인가
맞다. 하지만 늘 긴장하고 있다. 장사 망하는 건 한순간이다. 끊임없이 고민이 되는 것 같다. 결국 사업을 하는 건 가족이 생기는 일인 것 같다. 우리 가게에 나를 제외해도 정직원이 3명이 더 있고 아르바이트 생이 5명이 있다. 이들에게 월급은 또 그들의 생계의 시작점 아닌가. 그리고 그 생계의 시작이 이 가게에 있다. 진짜 잘되야한다.
소중한 자신의 가게에서 여러 사람을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이다.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했을 것 같나
음. 다시 돌아간다면 사람을 더 많이 만나되, 관계에서 스트레스는 덜 받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지금 생각해봐도 사람을 많이, 더 깊이 만나고는 싶은데 그때는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는 되게 많이 받았던 것 같더라.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후배들이나 선배들에게 혹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인생에 목표를 갖는 건 좋지만 그 목표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 목표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다른 방향에 새로운 목표를 만들면 되니까. 목표라는 것도 순간순간의 감정에 따라 마음대로 만들고 없애도 아무 상관없더라.
오히려 운 좋게 더 좋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으니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학생활 아디오스